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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비교적 최근에 고고학자들은 반치앙(Ban Chiang)의 북동쪽 작은 마을 근처에서 약 5천6백년 전의 것으로 추측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.
- 이후 몬족, 크메르족, 타이족을 비롯한 많은 종족들의 이민 행렬이 이어지게 되었고 지금의 태국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땅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중국 남쪽으로부터 기름진 땅과 강, 계곡을 따라 천천히 이동해온 무리들이었다.
- 약 11,12세기경에는 크메르족이 앙코르로부터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기도 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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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12세기 초, 타이족은 북쪽의 란나(Lanna), 파야오(Phayao), 수코타이(Sukhothai)에 조그만 공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했고,
- 1238년에 이르러서는 2명의 타이 지도자들이 크메르 영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최초의 독립 왕국인 수코타이(Sukhothai "행복의 새벽"이라는 의미)를 세웠다.
- 수코타이 왕국은 향후 짜오프라야(Chao Phraya)강 유역을 따라 발전하게 되는 타이왕국의 기초가 되었으며, 태국의 국교인 테라바다 불교(Theravada Buddhism),
- 즉 소승불교를 확립하고, 태국 문자의 발명, 미술, 조각, 건축과 문학 등 태국 예술형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.
- 수코타이 왕국이 1300년경에 쇠퇴일로를 걸으면서 결국에는 신흥 왕국인 아유타야(Ayutthaya)의 종속국이 된다.
- 1350년에 건립된 아유타야 왕국은 짜오프라야 강 남부 멀리까지의 지역을 영토하에 두었고, 1767년 버어마의 침략을 받기까지 태국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.
- 417년간 33명의 왕이 통치한 아유타야 왕국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켜 전체적으로는 크메르의 영향에서 벗어나 아라비아, 인도, 중국, 일본 및 유럽과도 관계를 맺기도 했다.
- 이 아유타야의 붕괴는 프랑스 파리나 영국 런던의 붕괴와 비견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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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그러나 후에 딱신(Taksin)왕이 버마(현 미얀마)를 몰아내고 수개월만에 타이왕국을 재건, 톤부리(Thon Buri)에 수도를 정했으며 1782년에 이르러 짝끄리(Chakri)왕조의 초대왕인 라마1세가 짜오프라야 강 유역의 방콕으로 천도하게 되었다.
- 짝끄리 왕조의 국왕 가운데 1851년부터 1868년까지 통치한 라마 4세 몽쿳(Mongkut) 국왕과 1868년에서 1910년 사이에 통치했던 그의 아들 라마 5세 쭐라롱껀(Chulalongkorn)
- 국왕은 탁월한 외교술과 선별적 현대화를 통해 태국을 서구 제국 열강의 식민지화 공세로부터 지켜내었다.
- 현재의 태국은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여 1932년 이래 현재의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데 (H.M. King Bhumibol Adulyadej) 국왕에 이르기까지 태국의 국왕들은 국회를 통하여 입법권을,
- 수상이 이끄는 내각을 통하여 행정권을, 사법부를 통해 사법권을 행사해 오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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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한국과 태국의 관계
- 태국과 한국의 관계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인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. 태국의 옛 이름인 싸얌 왕조는 1391년과 1393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교역사절단을 파견했다.
- 그러나 해로에 나타나는 해적 때문에 교류가 중단되었으나, 단절된 양국관계는 1950 년 태국정부가 3,650명의 태국 젊은이들을 유엔군의 일부로써 한국전쟁 (6.25)에 파견함으로써 재개되었다.
- 태국 군대는129명의 사상자와 1,139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나머지는 한국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가지고 돌아왔고 젊은 세대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기도 했다.
- 태국은 한국과 오랜 우방 관계를 지속해 온 국가로 1949년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, 한국 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1972년까지 한국에 주둔하기도 했다.
- 1959년에 정식으로 양국간에 외교관계가 성립되었고 1981년 양국간 사증면제협정 체결로 한국인은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비자 없이 90일간 태국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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